1. 전기의 도입과 초기 상황
1945년 해방된 이후 길음동에는 몇 가구에 한해서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길음동은 다른 동네에 비하면 전기가 일찍 들어온 편에 속하는데, 이것은 일제 강점기 때 길음동에 화장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장터에서 전기를 사용하여 화장을 하였기 때문에 송신소에서 전기를 길음동으로 보내는 전선이 연결되어 있었고, 이 선을 이용하여 가정에도 전기가 보급될 수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는 주로 10W 혹은 20W 전구를 켜는데 전기를 사용했으며, 60W 전구를 쓰면 전력이 부족해 불이 꺼지곤 했습니다. 콘센트가 따로 없어서 전기 소켓에 콘센트를 달아 라디오를 듣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각 가정에 전기가 보편화되었으나, 전기 요금을 못 내서 전기가 끊기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때에는 전기 요금이 고지서로 나왔으며, 그 자리에서 전기 요금을 내야 했는데 내지 못하면 바로 전기가 끊겼습니다. 전기가 끊기면 사람들이 철사를 이어서 전기를 몰래 쓰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를 '도둑 전기'라고 하는데, 발각되는 경우에는 몇 배에 해당되는 벌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마포구 당인동에 있던 서울 화력 발전소에서 서울 시내에 모든 전기를 공급하였습니다. 전기 들어온 지 오래됐어. 길음동에, 상수도는 아주 늦게 들어왔어. 상수도는 아마 57년도, 58년도 이때들어왔어. 전기는 그 이전부터 들어왔는데 툭하면 나가. 약해가지고 불이 들어오지를 않아. 그러니까 들어오다가 끊겨. 한참 있다가 들어오고, 그러고 아주 밤중에는 안 줘. 전기를. 10시 넘으면 전기를 안 줬어. 전기는 6.25 전부터 있었는데 몇 집안 있었고, 그것도 전기료를 낼 수 있는 형편만, 있는 사람만 전기를 놓고 없는 사람은 등잔불 쓰고 그랬어. 전기가 화장터 때문에 들어왔을지도 몰라. 그리고 화장터가 서울 시내에 홍제동 화장터하고 여기 화장터 하고 밖에 없었어. 화장터는 전기가 필요하잖아. 그러니까 그거는 왜정 때부터 들어와 있던 거고, 그러니까 그 후에 조금씩 퍼지기 시작해서 제재소가 있었고, 제재소가 여기 삼부아파트 있지? 길음역 시장 건너편으로 그쪽으로 쭉 많았었어. 그 뒤로 가서 은방. 수제공장들. 그래서 빨리 들어왔지. 그래서 전기가 약하니까 원래 들어오는 게 약하니까 나갔다 안 들어왔다 그러지. 전기 쓰는 게 등 밖에 없었어. 다른 거는 쓸 게 없었어. 가정에서는 10W 짜리, 10W, 20W 요정도 밖에, 60W. 많이 써야 60W 쓰는데, 60W는 쓰지를 못 해. 불이 안 들어와. 소켓 옆에다가 콘센트를 하나 달았어. 다마에다가 소켓 하나를 달아서 꽂았어. 다마 옆에 콘센트를 하나 달았어. 소켓. 다마 소켓 자체에다가 콘센트를 하나 꽂을 수가 있었어. 이제 그거 갖다가 틀고 라디오 줄 이어 가지고 틀고 그러다가 전기 나가면 못 듣고.
2. 전기 사용의 어려움과 도둑 전기
전기가 보편화된 것은 6.25 전쟁 이후였습니다. 6.25 이후에도 여전히 힘들었고, 196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편화되었습니다. 당시 전기료는 비쌌기 때문에 전기를 못 다는 가정도 많았습니다. 전기료는 고지서가 나오고, 고지서가 나오면 요금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돈을 제때 못 주면 바로 전기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도둑 전기를 쓰는 일이 생겼습니다. 끊긴 전기를 철사로 이어서 몰래 쓰는 일이 많았고, 들키면 몇 곱절의 벌금을 내야 했습니다.
전기가 일찍 들어왔지만 아무나 사용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는 남포라는 것이 있었는데, 남포는 등잔 말고 유리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기를 증설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계량기가 없어서 무조건 기본료만 내고 전기를 사용했습니다. 계량기가 비싸서 모든 가정에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몰래 전기를 사용하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전압기가 자주 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전동 하나만 사용하도록 했는데, 거기다 전기 곤로를 쓰다 보니 전압기가 타곤 했습니다. 이후 계량기를 설치하면서 전기 사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3. 전기의 보편화와 TV의 등장
1950년대 후반에는 흑백 TV가 등장하면서 전기 사용의 양상이 변했습니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 경기가 있을 때면 TV가 있는 집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시청하곤 했습니다. 초기 TV는 고가였기 때문에 몇 가정만 소유하고 있었으며, 만화 가게에서는 TV 시청료를 별도로 받기도 했습니다.
1958년, 1959년경에 흑백 TV가 처음 나왔습니다. 초기에는 국산 TV가 없었고 외제 TV가 있었습니다. 당시 방송국은 종각 옆에 있었고, 하루에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방송했습니다. 이후 KBS가 시작되었으며, TBC라는 개인 방송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아리처럼 산이 막힌 지역에서는 방송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각 가정에서 TV를 소유하게 되었고, 전력 사용량은 120W 정도였습니다. 이는 초기 전기 사용 상황에 비해 많이 개선된 것입니다. 당인리 발전소와 화천 발전소가 주요 전력 공급원이었고, 이는 점차 가정용 전기로 보급되었습니다.
4. 상수도의 도입과 생활 변화
전기 도입 이후, 상수도는 1957년, 1958년경에 길음동에 들어왔습니다. 상수도 도입은 전기보다 늦었지만, 상수도가 들어오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습니다. 전기는 6.25 전쟁 전부터 있었으나, 일부 가정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전기 사용이 가능한 가정은 기본료만 내고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계량기가 없어 몰래 전기를 사용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5. 전기 사용의 경제적 어려움
전기 보급 초기에는 계량기가 없어 기본료만 내고 전기를 사용했으나, 계량기 도입 이후 전기 사용량을 측정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전기료는 매우 비쌌고, 요금을 제때 내지 못하는 가정에서는 도둑 전기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도둑 전기는 철사를 이용해 퓨즈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으며, 발각될 경우 큰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발전소는 당인리 발전소와 화천 발전소가 주요 전력 공급원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전력 사정이 열악했지만, 점차 전기 공급이 안정화되면서 많은 가정에서 전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에는 흑백 TV가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가정에서 TV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TV는 고가였기 때문에 소수의 가정에서만 소유하고 있었으며, 만화 가게에서는 TV 시청료를 별도로 받기도 했습니다.
1958년, 1959년경에 흑백 TV가 처음 나왔습니다. 초기에는 국산 TV가 없었고 외제 TV가 있었습니다. 당시 방송국은 종각 옆에 있었고, 하루에 세 시간에서 네 시간 정도 방송했습니다. 이후 KBS가 시작되었으며, TBC라는 개인 방송국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아리처럼 산이 막힌 지역에서는 방송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