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성북구 길음동의 옛 의료 문화

들어가며

1950년대의 한국 사회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많은 변화와 도전을 겪었습니다. 길음동 역시 이러한 변화를 겪은 지역 중 하나로, 이곳의 의료 문화는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길음동의 의료 시설과 진료 방식,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상을 통해 그 당시의 의료 환경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 길음동에는 두 개의 주요 의료 시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순천당 산부인과였으며, 다른 하나는 삼성의원이었습니다. 이 병원들은 종합병원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수술보다는 진료와 약 처방을 주로 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은 병원에 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병원에 한 번 다녀오면 집안이 망할 정도로 비용 부담이 컸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큰 병이 아니면 병원을 찾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병원의 역할과 주민들의 고충

1950년대 중반부터 연탄으로 난방을 하면서 연탄가스를 마시는 사고가 자주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병원이나 약국이 별로 없고,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할 형편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요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김치 국물을 마시거나 집에서 굿을 하는 등의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한 지역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50년대에는 의원이 두 개인가 있었어. 삼성의원 하고 순천당 의원 하고, 순천당 의원은 주로 산부인과 했고, 종합병원이랑 똑같지. 수술은 못 했지. 약 처방하고 주사나 놔주고 큰 병 있으면 큰 병원으로 가라 그러고 그랬어. 힘들었지. 병원 한 번 갔다 오면 집안 망하는 거야. 회충약은 학교에서 주고 그랬어." (이종환, 남, 1941년생, 2009.9.1)

홍순원 씨는 1958년에 길음동에 병원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초가집에 나무로 된 수술대에서 환자를 능혁 놓고 수술을 했으며, 산부인과 환자가 많았습니다. 홍순원 씨는 왕진을 다녔는데, 환자를 치료하는 사이에 자신의 신발을 훔쳐 달아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내가 대학 나온 정식으로 진짜 의사로서는 처음이었지. 그 뭐, 환자는 전부 다 산모였어. 병원은 집도 아니고 포그 안 초가집, 기와집 그런 데서 했지. 수술은 흙바닥에 상 하나 놓고 했어. 돈이 없으니까 수술대도 살 수 없었지. 판자로 만든 수술대에서 수술했어." (홍순원, 남, 80대, 2009.3.13)

산부인과와 외과의 어려움

홍순원 씨의 부인은 그 당시의 의료 환경과 경제적 어려움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우리 외과의사는 산부인과도 하고, 무척 수술도 많이 했어요. 환자 많이 보고, 산동네에서 많이 치료했지. 왕진 가서 아기 낳고, 애기 받아 주면 돈도 못 받고, 공짜로 했지. 근데 신발까지 훔쳐가. 가난하니까." (홍순원 씨 부인, 여, 1930년생, 2009.3.13)

홍순원 씨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행장환자는 몇 백 명 있었을 거야. 맹장환자, 자궁 외 임신, 정형외과 환자도 보고, 교통사고 나면 서울대학에 전화해서 같이 해주고 그랬어. 병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도움을 받았지." (홍순원 씨 부인, 여, 1930년생, 2009.3.13)

약국의 역할과 주민들의 생활

같은 해 길음동에 약국을 낸 이문규 씨에 따르면, 감기약, 소화제, 연고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의약분업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에 가기보다는 우선 약국에 가서 약을 처방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의약분업이 돼서 그렇지만 그전에는 약국이 병원이랑 똑같았지. 이쪽이 전부 난민촌이라고 철거시키려고 했던 지역이었어. 빈민들이 많았지. 집에 대문도 없고, 가마니로 대문을 대신하고, 거적을 덮고 살았어. 없는 집이 애들은 많이 낳았지. 그러면 밥을 굴다시피 했어. 산모들한테는 미역이나 쌀을 주기도 했지. 약국에서도 비락 우유를 마진 없이 주곤 했어." (이문규, 남, 1934년생, 2009.3.18)

1970년대에는 길음동에 안산부인과를 비롯하여 홍순원 내과, 치과 등이 형성되었습니다. 길음 역세권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길음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에 병원을 못 가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길음 1동 판잣집에 살던 사람들 중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병원에 자신의 피를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병원이 많이 있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홍순원 내과는 없어졌고 안산부인과는 저 위에서 내려왔어. 그때는 저 위쪽 돌산에 아파트가 있었지. 지금보다는 취약했지만, 여기는 상업지역이라 장사하는 사람들은 먹고살 수 있었어." (오복례, 여, 1951년생, 2009.6.18)

길음동의 의료 문화 변화

길음동의 의료 문화는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초기에는 소수의 의원과 약국이 있었고, 주민들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병원 방문을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료 시설이 늘어나고,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의료 접근성이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홍순원 씨와 이문규 씨의 회상은 당시의 의료 환경과 주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초가집에서 수술을 하고, 약국에서 감기약과 소화제를 처방받던 시절, 주민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함께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오늘날의 의료 환경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공동체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길음동의 의료 문화는 단순히 의료 시설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어려움과 도전을 극복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길음동의 옛 의료 문화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고, 현재의 의료 환경과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결론: 옛 길음동 의료 문화의 의의

1950년대와 1970년대의 길음동 의료 문화는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반영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주민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돕고, 민간요법에 의존하며 살아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의료 시설이 늘어나고, 주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의료 접근성이 개선되었습니다.

홍순원 씨와 이문규 씨의 회상은 당시의 의료 환경과 주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의료 환경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공동체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길음동의 의료 문화는 단순히 의료 시설의 변화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길음동의 옛 의료 문화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이해하고, 현재의 의료 환경과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며, 당시 사람들의 삶과 도전을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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