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길음시장의 형성과 주민들의 생계
길음시장은 1950년대 이후 정릉천을 따라 목다리 밑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길음동은 의정부, 동두천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입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일대에서 물건을 싣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6.25 전쟁 이후, 길음 1동에는 집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길음시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한 생계 수단이 되었습니다.
길음시장에서는 많은 이들이 배추, 무 등 다양한 농산물을 판매하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의정부나 동두천에서 농산물을 실고 온 사람들은 길음시장에서 신발이나 다른 생활용품과 교환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김영식씨는 "새벽에 나왔다가 저녁때 가면 12시쯤 되지. 이빠이 갖고 와가지고 교환해서 팔고 팔지 않으면 교환해서 가지"라고 회상했습니다. 이처럼 길음시장은 농산물과 생활용품의 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2. 길음시장의 활성화와 경제 활동
1960년대에 길음동으로 이주한 사람들 중에는 시장에 농산물을 내다 파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오전에 밭에서 무, 배추, 가지 등을 리어카에 싣고 오후 5시부터 길음시장에서 자리를 잡고 팔았습니다. 밭에서 직접 나는 것을 팔기 때문에 다른 상인들보다 싸게 판매할 수 있었고, 약 2시간이면 모든 물건이 팔리곤 했습니다.
길음시장에는 물건을 파는 장소가 정해져 있었고, 하루 자릿세를 내야 했습니다. 자릿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따로 있었고, 이를 내지 않으면 쫓겨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김태봉씨는 "시장에서 자릿세 받으려 다니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들한테 잘못하면 쫓겨나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자릿세는 시장 운영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이를 통해 시장은 정비되고 체계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3. 월동 준비와 배달 서비스
예전에는 겨울이 되기 전에 쌀과 연탄을 미리 사놓고 김장을 하는 것이 월동 준비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쌀 2가마와 겨울철 내내 사용할 수 있는 연탄 200개 정도를 장만했고, 김장을 할 때는 100포기 정도를 하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많은 양을 구입하기 때문에 시장에는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숙회씨는 "옛날에는 배달을 안 해주고 김장 때는 운반. 돈을 주고 운반비를 주고 싣고 갔어. 지금은 배달해주지만 옛날엔 배달 안 해줬어"라고 회상했습니다. 당시에는 배달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아, 리어카를 이용해 물건을 직접 운반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리어카를 끌고 가는 사람들에게 운임을 지불해야 했고, 동네 사람들끼리 협력하여 물건을 나르는 일이 많았습니다.
4. 시장과 주민들의 협력
길음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주민들이 협력하며 살아가는 공간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서로 도와가며 일을 했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께 극복해 나갔습니다. 주민들은 시장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고,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이러한 협력과 상호 의존은 길음동의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길음시장은 서울의 5대 시장 중 하나로 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생계를 이어가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시장의 활성화는 주민들의 경제 활동을 촉진하고, 다양한 일자리를 제공하였습니다. 김장을 위한 재료를 구입하고 운반하는 과정에서 리어카를 사용하는 등, 주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길음시장의 활성화와 주민들의 협력은 길음동의 사회적 구조와 생활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시장을 중심으로 한 경제 활동은 주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으며, 길음동은 더욱 활기찬 지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