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 이야기

구멍가게의 전성기와 변화

김창원씨는 이북 출신으로 1965년부터 길음동에 거주하면서 구멍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70년대의 길음동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인구가 많았습니다. 길음 3동에만 인구가 3만 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1970년대에는 구멍가게가 잘 되었습니다. 당시 잘 팔리던 품목은 막걸리, 소주, 라면, 계란, 두부, 과자 등이었습니다. 계란, 두부, 파 등은 청량리 도매시장에서 구입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술을 마시더라도 좋은 안주를 먹는 사람이 없었고, 술만 사서 먹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동네에 노인정이 1975년도에 생겼는데, 노인정이 생기기 전에는 구멍가게 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구멍가게 앞에서 어른들은 술을 마시고, 아이들은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구슬은 구멍가게에서 구입하고, 딱지는 집에 있는 종이를 접어서 만들었습니다.

구멍가게는 대형 슈퍼마켓의 등장으로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주택가에 일부 남아있습니다. 노인정이 생기기 전에는 주민들이 구멍가게 앞에 모여 교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김창원씨의 말에 따르면, 그 시절 사람들은 구멍가게 앞에서 술을 많이 마셨고, 서민들이 술을 많이 찾았습니다. 구멍가게에서는 술뿐만 아니라 과자, 생활 필수품도 판매하였고, 이는 당시 주민들의 중요한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방앗간의 역사와 변천

이경우씨는 길음동 토박이로, 약 66년 전에 이경우씨의 어머니가 방앗간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길음동에 방앗간이 세 곳밖에 없었는데, 명절 때만 되면 줄이 50미터 정도에 이를 정도로 손님이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밀가루, 쌀 등의 재료를 마차로 싣고 와서 가족들이 직접 가루를 빻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기름으로 불을 때는 것이 아니라, 나무로 불을 때서 떡을 만드는 시절이었습니다.

방앗간에는 가루를 빻는 분쇄기, 쌀을 도정하는 정미기 등이 있었는데, 기계가 고장이 나면 이경우씨가 자전거를 타고 을지로 6가에 가서 수리해오기도 했습니다. 방앗간이 한참 바쁠 때는 이경우씨를 비롯하여 온 가족이 함께 일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방앗간은 단순히 재료를 가공하는 곳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방앗간을 찾아 떡을 만들고, 가루를 빻으며 방앗간은 지역 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방앗간 운영의 어려움과 가족의 역할

방앗간 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경우씨는 기계를 수리하고, 나무로 불을 때고, 가루를 빻는 일을 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기계가 고장이 나면 자전거를 타고 을지로 6가에 가서 수리해오거나, 가까운 철공소에 가서 수리해야 했습니다. 방앗간에는 가루를 빻는 분쇄기, 쌀을 도정하는 정미기, 떡을 빻는 노라 등이 있었고, 이 모든 기계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은 매우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방앗간이 바쁠 때는 이경우씨를 비롯한 온 가족이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방앗간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기계들을 다루고, 기계를 수리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경우씨는 당시 방앗간에서 일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기계가 고장 나면 직접 수리하고, 무거운 재료를 나르는 등의 일을 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방앗간은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일하고 성장하는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길음동의 생활과 사회 변화

길음동은 1970년대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길음동에 정착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었고, 이는 지역 사회의 다양한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구멍가게와 방앗간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구멍가게는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였고, 방앗간은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형 슈퍼마켓과 아파트의 등장으로 구멍가게와 방앗간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형 슈퍼마켓을 이용하면서 구멍가게는 점점 사라졌고, 방앗간도 예전만큼 활발히 운영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길음동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많은 주민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남아 있습니다.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구멍가게 앞에서 모여 교류하고, 방앗간에서 함께 일하며 공동체의식을 키웠습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길음동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결론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구멍가게는 주민들이 모여 교류하는 장소였고, 방앗간은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형 슈퍼마켓과 아파트의 등장으로 이러한 장소들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은 길음동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은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주민들은 구멍가게 앞에서 모여 교류하고, 방앗간에서 함께 일하며 공동체의식을 키웠습니다. 이러한 장소들은 길음동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을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은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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