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앵두나무 밭과 농작물 재배
앵두나무 밭의 규모와 수확
길음동에는 서울에서도 큰 규모에 속하는 앵두나무 밭이 있었다. 이 앵두나무 밭은 개인 소유로, 앵두 수확 시기에는 20~30명의 일꾼을 고용했다. 앵두 수확 시기는 매우 바빠서 주인이 직접 일꾼들을 감독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일꾼들은 앵두를 따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주인은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품질을 관리했다. 수확이 끝나면 품질이 떨어지는 앵두는 일꾼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농작물 재배와 지역 경제
앵두 외에도 길음동에서는 다양한 농작물이 재배되었다. 특히 호박, 배추, 무, 미나리 등이 주로 재배되었으며, 이들은 인근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농작물 재배는 지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많은 주민들이 농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특히 배추와 호박은 길음동의 대표적인 농작물로,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농업 활동은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6. 일제 강점기의 마구간과 나무 판매
마구간의 역할과 역사
일제 강점기에는 길음동 근처에 많은 마구간이 있었다. 미아삼거리는 서울 시내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고, 동두천, 연천, 의정부, 포천, 철원 등지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상인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이들은 길음동의 마구간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소에게 여물을 먹이고, 다음 날 서울 시내의 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마구간은 당시 교통 상황과 상업 활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나무 판매와 생계
8.15 해방 이전에는 길음동과 월곡동 지역에서 나무를 잘라 판매하는 일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산에서 나무를 잘라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가서 팔았다. 나무 판매는 난방을 위해 필수적이었고, 당시 연탄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무 장작이 주요 난방 연료였다. 나무를 판매하는 사람들은 사는 사람의 집까지 나무를 운반해 주었고,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해방 후에는 산이 황폐화되고 나무를 파는 일이 줄어들었지만, 이러한 활동은 당시 주민들의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7. 도살장과 관련 생업
도살장의 역사와 역할
미아삼거리를 중심으로 월곡동과 길음동에는 도살장이 있었다. 도살장은 서울 시내의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공급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도살장 근처에는 소의 뼈를 끓여 접착제를 만드는 아교 공장, 소와 돼지가죽으로 제품을 만드는 피혁 공장, 소의 뿔과 발톱으로 단추를 만드는 단추 공장 등이 있었다. 이러한 공장들은 도살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활용하여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도살장 기반의 산업
도살장을 중심으로 한 산업은 지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도살장에서 나오는 소와 돼지는 아교, 피혁, 단추 등 다양한 제품의 원료가 되었고,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도살장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되었으며, 도살장 기반의 공장들도 그와 함께 번성했다. 이러한 산업 활동은 길음동과 월곡동의 경제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8. 해방 이후의 경제 변화
공동묘지 이장과 주택 개발
1949년 경기도의 일부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길음동도 서울의 일부가 되었다. 1957년에는 길음동의 공동묘지가 고양군 벽제로 이장되었고, 그 자리에 주택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서울의 판잣집 철거민들이 이주해 오면서 길음동은 빠르게 주거 지역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주택 개발은 길음동의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군 부대 주둔과 관련 생업
6.25 전쟁 이후 길음동 지역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관련 생업이 발전했다. 미군을 상대로 한 술집과 양색시(양공주)가 등장했고,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빨래를 빨거나 수입품을 되파는 사람들이 생겼다. 젊은이들은 미군의 빨래를 전달해주거나 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하우스 보이'로 불리며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수입 양품을 시장에 되파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은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