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 사람들의 생계와 생업 - 원주민들의 농사와 생계 Part.1

1. 길음동의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길음동은 일제 강점기 동안 경기도 고양시 숭인면에 속해 있었다가, 해방 이후 서울로 편입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한반도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많은 주민들이 고통을 겪었고,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사회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길음동 주민들의 생계와 생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 편입과 지역 변화

해방 후, 길음동은 서울에 편입되면서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특히 1950년대 이후 서울의 확장과 함께 길음동에도 많은 외지인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역의 경제 구조와 주민들의 생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농업과 목축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생업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길음동의 경제적 발전과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2. 공동묘지와 채석장의 역사

공동묘지 조성과 관련 일자리

길음동의 높은 지대는 일제 강점기 동안 공동묘지로 조성되었다.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다. 많은 주민들이 비석을 제작하거나 봉분을 쌓는 등 묘지와 관련된 일에 종사했다. 이러한 일자리는 단순한 노동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공동묘지와 관련된 작업은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반영하는 중요한 활동이었으며, 주민들 간의 협력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채석장의 운영과 채석공의 역할

길음동에는 큰 돌산과 작은 돌산이 있었고, 이곳에는 채석장이 운영되었다. 채석장은 주로 대리석과 같은 건축 자재를 생산하는 곳으로, 지역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도 채석장에서 일했다. 채석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돌을 다루는 기술을 필요로 했으며, 이들은 채석공으로 불렸다. 채석장은 공동묘지의 비석을 비롯한 다양한 건축 자재를 생산하며 지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농업과 생계 유지

길음동의 주요 농작물

길음동의 대부분의 토지는 일제 강점기 동안 보리밭과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외지인들이 길음동에 터를 잡으면서 보리밭이 주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호박, 배추, 무, 미나리 등을 재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 농작물은 인근 미아시장과 길음시장에 내다 팔리며 지역 경제를 지탱했다. 특히 호박밭은 길음동의 상징적인 풍경 중 하나였다.

보리밭과 주택 개발

보리밭이 점차 주택으로 개발되면서 농업의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주민들이 소규모 농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주택 개발은 길음동의 인구 증가와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나, 농업 활동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음동 주민들은 끈기 있게 농사를 지으며 지역 경제를 지원했다.

4. 지역 경제와 시장 활동

미아시장과 길음시장의 형성

1950년대 이후 길음동과 인근 지역에는 미아시장과 길음시장이 형성되었다. 이 시장들은 지역 주민들의 주요 생계 수단이자 교류의 장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장에서는 길음동에서 재배된 농산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들이 거래되었다. 이러한 시장의 형성은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주민들의 생계 유지에 큰 도움을 주었다.

농작물 판매와 주민 생활

길음동 주민들은 자신들이 재배한 농작물을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특히 배추와 호박은 지역의 주요 농작물로 인기를 끌었다. 주민들은 시장을 통해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고, 상호 간의 교류를 통해 지역 사회의 유대감을 강화했다. 이러한 시장 활동은 주민들의 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었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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