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고개는 오늘날 서울 시민들에게 그저 평범한 도로의 한 구간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고개에는 한국 현대 문학사의 숨은 보석과도 같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바로 서라벌예술대학의 이야기입니다. 1960년대, 이 작은 대학은 한국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수많은 문인들을 배출했습니다. 오늘은 그 숨겨진 역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미아리고개, 문학의 요람이 되다
1950년대 말, 서울의 외곽이었던 미아리고개 일대는 빈곤과 전쟁의 상처가 아직 생생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1957년 설립된 서라벌예술대학은 이 황량한 풍경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소설가 이경자의 회고에 따르면, "미아리고개를 올라가서 지금 버스 정류장이 있는 그쯤에서 오른쪽에 그냥 루핑으로 된, 루핑이 없었거나 뭐 그런 집들이 다닥다닥 있었어요." 이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서라벌예술대학은 문학의 꿈을 품은 젊은이들을 끌어모았습니다.
당시 미아리고개는 서울 시내에서 접근성이 좋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전차나 버스를 타고 혜화동로터리와 삼선교를 거쳐 돈암동 종점에서 내려 미아리고개 비포장 길을 올라 다시 10분 정도 내려가야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문학 지망생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는 사실은,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이 가진 매력과 영향력을 잘 보여줍니다.
서라벌예술대학, 문학의 용광로
서라벌예술대학의 문예창작학과는 당시 한국 문단의 거장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했습니다. 서정주, 박목월, 김동리, 조연현 등 쟁쟁한 문인들이 강의를 맡았죠. 이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치열한 창작 활동을 펼쳤습니다.
북디자이너 정병규의 증언에 따르면, "문학을 학습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지 배우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다들." 이런 열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매주 새로운 작품을 써내야 했고, 날카로운 비평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대학의 교육 방식입니다. 정규 수업 외에도 학생들은 자주 교수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학과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가 오갔고, 이는 학생들의 문학적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날씨가 좋으면 수업을 학교가 아닌 인근 '밀리언 다방'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미아리 시절'의 고단함과 낭만
하지만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소설가 이경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정말 좁고 허름하고 추운 집이었어요. 그때는 다 가난하고 배고프니까 주인 할머니가 버려지는 무청 같은 거를 가져다가 소금에만 절여 항아리에다가 넣어서 뒤란(집 뒤 울타리 안)에다 두었어요. 그럼 그걸 우리가 몰래 꺼내 먹었어요."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생들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종종 인근 길음시장의 허름한 술집에 모여 문학을 논하고 꿈을 키웠습니다. 이 시기를 거쳐 간 많은 작가들이 '미아리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고단함 속의 낭만 때문일 것입니다.
정병규는 "예술대학에서 제가 배운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된다, 더 다른 세계가 있다, 이 현실 너머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당시 학생들이 가졌던 이상주의적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문학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고, 현실을 초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서라벌예술대학의 교육 철학과 방식
서라벌예술대학의 교육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습니다. 정규 커리큘럼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자발적인 창작 활동과 토론이었습니다.
문예창작학과의 경우, 학생들은 매주 작품을 한 편씩 써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는 이 작품들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합평회'가 열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날카로운 비판이 오갔고, heated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서라벌예술대학은 학생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었습니다. 정병규의 회고에 따르면, 학생들은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날도 많았다고 합니다. "문학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학교 강의시간에 나가느냐"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당시 학생들에게는 이런 자유로움이 창작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서라벌예술대학이 남긴 유산
서라벌예술대학은 1972년 중앙대학교에 합병되면서 그 역사를 마감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이곳을 거쳐 간 작가들 - 김주영, 김원일, 오정희, 이문구, 조세희 등 - 은 한국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서라벌예술대학에서의 경험이 그들의 문학 세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정희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가난하지만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모습은 그녀의 서라벌예술대학 시절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서라벌예술대학은 한국 문학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실제 창작 활동과 토론 중심의 교육 방식은 이후 많은 문예창작학과들이 참고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서라벌예술대학과 1960년대 한국 사회
서라벌예술대학의 이야기는 1960년대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병규의 말처럼 "1960년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학생 '운동'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 당시 '운동' 바깥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생각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고 말았습니다." 서라벌예술대학의 이야기는 이런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의 인구 유입이 급증했고, 이는 서울 외곽 지역인 미아리 일대의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의 삶은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는 한국 문학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전후 문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학적 시도들이 이루어졌고, 서라벌예술대학은 이런 변화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전통적인 문학관념에 도전하며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작품들을 창작했습니다.
오늘날의 의미: 서라벌예술대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서라벌예술대학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첫째, 교육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합니다. 서라벌예술대학의 자유로운 학풍과 실천 중심의 교육은 오늘날 획일화된 교육 시스템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둘째,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서라벌예술대학 학생들이 가졌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이상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셋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결론
미아리고개의 서라벌예술대학은 이제 물리적으로는 사라졌지만, 그곳에서 피어난 문학의 꽃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이 작은 대학이 한국 문학사에 미친 영향을 되새기며, 우리는 문학과 예술의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