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 역사

성북구 길음동 시장의 아직 다 하지 못한 나머지 이야기

한국전쟁 이후 길음동의 인구 증가와 일자리 부족 한국전쟁 이후 길음동에는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인구가 증가했습니다. 특히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때만 하더라도 일자리라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루 벌어서 그날 그날의 생계를 꾸려나가기에도 벅찼습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피를 팔아서라도 생계를 이어야 했습니다. 피를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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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길음동의 구멍가게와 방앗간 이야기

구멍가게의 전성기와 변화 김창원씨는 이북 출신으로 1965년부터 길음동에 거주하면서 구멍가게를 운영했습니다. 1970년대의 길음동은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인구가 많았습니다. 길음 3동에만 인구가 3만 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1970년대에는 구멍가게가 잘 되었습니다. 당시 잘 팔리던 품목은 막걸리, 소주, 라면, 계란, 두부, 과자 등이었습니다. 계란, 두부, 파 등은 청량리 도매시장에서 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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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장사: 성북구 길음동의 물 공급 역사

들어가며 길음동에 개인 수도가 설치된 것은 1975년도입니다. 당시 몇몇 사람들이 3만 원씩 공사비를 내고 개인 수도를 달았습니다. 그러나 개인 수도를 설치한 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 수도가 있는 집에서는 돈을 받고 이웃집에게 물을 파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물장사는 길음동 주민들의 중요한 생활 방식 중 하나였습니다. 1960년대에는 공동 수도가 있어서 길음동 주민들이 공동 수도를 이용했습니다. 공동 수돗물은 어떤 사람이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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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음동 사람들의 생계와 생업 - 원주민들의 농사와 생계 Part. 2

5. 앵두나무 밭과 농작물 재배 앵두나무 밭의 규모와 수확 길음동에는 서울에서도 큰 규모에 속하는 앵두나무 밭이 있었다. 이 앵두나무 밭은 개인 소유로, 앵두 수확 시기에는 20~30명의 일꾼을 고용했다. 앵두 수확 시기는 매우 바빠서 주인이 직접 일꾼들을 감독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일꾼들은 앵두를 따서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주인은 그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품질을 관리했다. 수확이 끝나면 품질이 떨어지는 앵두는 일꾼들에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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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음동 사람들의 생계와 생업 - 원주민들의 농사와 생계 Part.1

1. 길음동의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길음동은 일제 강점기 동안 경기도 고양시 숭인면에 속해 있었다가, 해방 이후 서울로 편입된 지역이다. 이 지역은 한반도 역사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으며,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 많은 주민들이 고통을 겪었고,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사회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길음동 주민들의 생계와 생업에 큰 영향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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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성북구 길음동의 빨래 문화- 개천을 따라 아녀자들이 모이다

과거 길음동의 빨래 문화 길음동은 한때 개천가를 따라 빨래를 하는 아녀자들로 가득했던 곳입니다. 정통천과 우이천 등 주변 개천 덕분에, 아녀자들이 팻감과 함께 솔과 양잿물을 가지고 나와 빨래를 하는 일은 일상이었습니다. 빨래터에 따로 빨래를 삶을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빨래를 삶아야 했습니다. 이후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빨래 비누가 등장했고, 이는 빨래 문화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아녀자들의 이야기 과거에는 옷이 귀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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